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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사진첩
조선총독부 | 온이퍼브 | 2014-10-0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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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사진첩
조선총독부 | 온이퍼브 | 2014-10-0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조선 사진첩』은 일제하 1921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화보집으로 우리나라 전반적인 정치, 문화, 사회의 전반적인 다양한 모습을 사진으로 수록한 책이다.
<서평> 서울 경성의 시가로 시작하는 것으로 금강산까지 우리 문화·역사의 건축물, 풍속, 환경의 변천사와 전해오는 사적과 자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두 수백 장의 사진이미지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당신의 통계자료를 함께 넣었는데 인구, 농업, 경제, 교육, 기관의 수치자료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이에 관련한 당시 사정과 그림 삽화들은 과거 대한민국 실상을 일본인들의 시각에서 과거사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갖게 해줄 것이며 이를 원본에서 영인한 화보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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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왕들, 금주령을 내리다
정구선 | 팬덤북스 | 2014-05-17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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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왕들, 금주령을 내리다
정구선 | 팬덤북스 | 2014-05-17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주식동원酒食同源, 주약동원酒藥同源?
국상 중에 술을 마셔 파면된 관리들, 임금에게 술 마시라고 강권하는 신하들, 소주에 산초를 타서 마신 세자의 스승, 술에 취하여 임금을 ‘너’라고 부른 정승까지…… 조선 시대의 천태만상 음주 풍습을 들여다보다! 술 마시기를 늘 하지 말고, 덕으로써 몸을 가지도록 하라. 어찌 해로우랴 말하지 말라. 그 해로움이 날로 심해지리라. - 숙종 요절한 왕자들, 임금의 옥좌에 올라간 관리, 임금의 명을 잊은 내시, 왕이 부탁한 점을 무시한 점쟁이, 말에서 떨어져 죽은 재상 등의 공통점은 모두 술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조선 시대 임금들이 내린 금주령은 여러 제약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한양에 크고 작은 술집이 가득 차고 넘쳤고, 어떤 이는 온 나라가 미친 듯이 술 마시기에만 전념하고 있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 시대의 술 문화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점잖고 엄숙한 유교 문화와는 사뭇 다르다. 술은 만악의 근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력 사건의 대부분은 술이 주요 원인이라고 한다. 《조선 왕들, 금주령을 내리다》는 조선 시대를 살다간 선조들의 음주 실태를 살펴봄으로써 현대인들에게 술의 해악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기본 자료는 《조선왕조실록》이며 모두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조선의 국왕과 술의 관계를, 제2부는 조선 시대 대표적 주당들의 행태와 술의 폐해를 살펴보았다. 조선의 국왕과 술 조선 시대에는 대궐에서 아침에 열리는 조회를 마치고 나면 국왕이 수고한 신하들에게 술을 내려 위로의 자리를 마련하곤 하였다. 국왕은 신하들만이 아니라 백성들은 물론, 심지어 죄수들에게 술을 하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술을 내려 주는 것은 국왕의 중요한 통치 행위의 하나였다. 술과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이다. 조선의 왕들 중 술을 좋아한 애주가를 꼽는다면 태종, 세조 ,영조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술을 자주 마시다 보니 자연히 주량도 강했다. 아무래도 즉위 전이나 재위 중 어려운 일을 많이 겪은 왕들이 술을 좋아했다. 태종은 ‘왕자의 난’이라는 골육상잔의 아픔을 겪었고, 세조는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조카를 몰아냈다. 영조는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고초를 겪었고, 재위 중에도 소론이 일으킨 무신란戊申亂 등의 변란과 치열한 당쟁을 치러야 했다. 임금의 주량은 당대의 정국 동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반대로 술을 가장 싫어했던 왕은 아마 세종일 것이다. 그는 본래 주량이 약하여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부왕인 태종과 신하들이 술을 강권하는 바람에 거절하느라 큰 곤욕을 치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주식동원酒食同源, 주약동원酒藥同源 조선 시대에 술은 바로 약이요, 음식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몸이 아프거나 허약할 때 약으로 술을 마시거나, 약을 먹을 때 술을 함께 마셨다. 술은 곧 약주藥酒요, 음주는 복약服藥, 즉 약을 복용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당시에 자주 쓰인 주식酒食이라는 말도 술이 일종의 음식으로 여겨졌음을 보여 준다. 술과 약, 술과 밥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는 말처럼 주식동원酒食同源이자 주약동원酒藥同源이었다. 조선인들에게 술은 몸이 좋지 않을 때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먹는 약이요, 약을 먹을 때도 반드시 같이 마셔야 하는 일종의 음식이었다. 술은 오곡의 정기가 들어 있으므로 적당하게만 마시면 참으로 좋은 약이었다. 신하들은 임금이 매일매일 술을 마시지 않으면 몸을 상할까 염려하여 술을 드시라고 강권하였다. 술을 즐기는 임금들에게는 괜찮았겠지만, 세종처럼 술을 싫어한 임금에게는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그렇다 보니 조선 시대에는 고위 관료들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술을 마시는 풍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것을 당시 사람들은 술을 숭상한다는 의미의 숭음崇飮이라고까지 일컬었다. 숭음 풍조는 건국 직후부터 나타나 나라의 큰 문제가 되었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숭음 풍조가 더욱 확산되어 신분이나 지역을 막론하고 음주가 거의 생활화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한양 도성 안에 큰 술집이 골목에 꽉 차고 작은 술집이 처마를 잇대어 있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마치 미친 듯이 오로지 음주만 일삼고 있다는 개탄이 나올 정도였다. 금주령의 허와 실 나라에서는 수시로 금주령을 내려서 술을 마시는 자와 빚는 자들을 엄히 단속하고자 했다. 금주령을 어겨 체포되거나 처벌받는 자들은 대부분 힘없는 백성이었다. 현장에서 집행하는 하급 관리들은 고위 관료들과 권세가들은 건드리지 못하거나 눈감아 주고 일반 백성들만 엄하게 단속하였다. 단속을 기화로 뇌물을 챙기는 일도 있었다. 금주령을 내리면서 사람들이 술병을 들고 밖에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병행하기도 했다. 집에서 마시는 술은 단속이 어렵자 대신 밖에서 술병을 가지고 다니며 마시는 것을 막아 보려는 궁여지책이었다. 물론 혼인, 장례, 제사 때와 노병老病에 약으로 마시거나 활쏘기를 할 때는 술병을 지니는 것이 허용되었다. 금주령은 조선 초기부터 시행했으나 예외 조항이 많아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기가 어려웠다. 우선 임금이 베푸는 연회, 종묘 등에서의 국가 제사, 외국 사신 접대 때는 금주령의 적용을 받지 않도록 했다. 늙고 병들어서 약으로 먹는 경우, 친지를 영접하고 환송하는 경우, 과거 합격자의 유가遊街 시에도 예외적으로 술을 허용하였다. 집안의 혼인, 장례, 제사, 환갑 등의 행사에도 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더구나 솔선수범해야 할 관료와 양반들이 잘 지키지 않았다. 금주령이 뜻대로 되지 않자 조선 후기에는 위반자를 처형하기도 하고, 단지 술에 만취하여 주정하는 짓만을 금지하는 선으로 후퇴한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으나, 역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금주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각종 폐해가 잇따르자 임금들은 계주교서戒酒敎書 등을 내려 술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지나친 음주를 훈계하고 경계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세종이 가장 적극적으로 술을 경계하였고, 선조와 영조 등의 왕들도 음주를 삼가라는 교서를 잇달아 반포하였다. 임금들에 의하면 술은 재물을 허비하고, 인성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명을 잃게 하고, 가정과 나라를 멸망시키는 원흉이었다. 특히 영조는 술이 사람을 미치게 하고 착한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만들어 각종 범죄에 빠져들게 하는 광약狂藥이라고까지 하면서 술을 함부로 마시지 말고 절주하라고 당부하였다. 조선의 술꾼들 세종 때 이조 판서를 지낸 허지, 병조 참판을 역임한 우승범, 세조 시절 좌의정이었던 이사철은 술이 무척 센 두주불사의 관료들이었다. 세조의 공신인 홍달손도 술을 매우 좋아한 대신이었다.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윤회는 세종이 술을 자제하라고 여러 번 당부하였으나 끝내 술을 끊지 못하였다. 태조의 우대를 받았던 재상인 홍영통은 태조의 탄신일 잔치에서 만취하여 집에 돌아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 소현 세자와 봉림대군을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모셨던 한형길은 소주가 싱겁다며 독한 산초를 타서 먹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조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영의정까지 오른 정인지는 술을 마시고 임금을 ‘너’라고 부른 적도 있다. 세조 8년에는 영의정 정창손이 어전에서 술을 마시고 실수하여 임금이 선위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예조 정랑 우계번이 술을 마시고 취하여 양반 부인을 모욕한 일이 있었다. 사헌부 관리인 이예는 술이 취하여 무엄하게도 임금이 앉는 평상에 올라가 술주정을 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무장인 어유소는 성균관에서 공자에게 지낸 제사 후 음복을 하고 취해 궁녀를 희롱하면서 술을 따르도록 하였다. 사헌부에서 처벌을 주청하였으나, 임금은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취중에 한 일이라면서 특별히 용서하여 주었다. 임금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내시 중에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시 최습은 술에 취하여 승정원에 전할 임금의 교지를 잃어버렸다가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내시 박인손은 대궐 밖으로 임금의 심부름을 갔다가 술에 취하여 곧바로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는 결국 곤장 60대를 맞아야 했다. 임금을 비방했다가 참형에 처해질 뻔했던 안동 부사 이전, 정승 조준을 저주했다가 참형을 당한 사헌부 감찰 김부도 술이 원인을 제공하였다. 세종 때의 이조 판서 홍여방은 동료 판서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과음하여 이튿날 갑자기 죽고 말았다. 효종 때의 병조 판서 박서는 연일 과음하다가 급사하였다. 개국 공신으로 오랜 기간 도승지로 재임한 박석명은 술병이 들어 36세에 요절하였다. 명재상 하윤의 아들인 하구도 술병이 걸려 37세에 죽었으며, 성종 때에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최경지도 술병으로 어느 날 갑자기 사망하였다. 조선 시대의 주폭과 벌주 풍습 조선 시대에도 주폭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있었다. 건국 직후에 안말건이 술에 취하여 거리에서 사람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말리는 사람을 구타하였다. 그는 곤장을 맞고 수군으로 강제 편입되었다. 자기 할머니의 상중에 풍악을 울리며 술을 마시고 남의 집에 들어가 행패를 부린 최선, 최굉 형제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성종 때는 그야말로 주폭 삼 형제라고 할 이들이 나타나 갖은 행패를 부렸다. 평양에 살던 생원 김하, 김거, 김석 삼 형제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함께 이모의 집에서 술을 마시며 이웃집의 여종을 불러다가 술을 따르게 하고 노래를 시키며 희롱하였다. 이것도 모자라 자신들을 제지하고 항의하는 여종의 남편을 심하게 때렸고, 남편의 여동생도 구타하여 업고 있던 아이를 죽게 만들기까지 하였다. 사헌부에서는 김거를 주범으로 보아 교수형에, 김하와 김석은 거든 자라 하여 곤장 1백 대에 해당한다고 결정하였으나, 이미 모두 도망쳐 처벌하지는 못했다. 그러자 영구히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는 처분을 내렸다. 조선 초기에는 조선으로 귀화하거나 귀순한 여진인, 즉 야인野人들을 위무하기 위해 재물을 넉넉하게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선지 밤낮으로 모여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하는 야인들이 많았다. 여진인만이 아니라 조선에 오는 일본인들도 술을 많이 마시고 술주정을 하는 폐해를 끼쳐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무언가 잘못을 하면 벌로 술을 억지로 마시게 하는 벌주 풍습이 널리 행해졌다. 왕실에서도 널리 행해져서 태조가 태종에게 벌주를 내린 적도 있고, 세조가 어떤 일을 자책하며 스스로 벌주를 마시려고 한 일도 있다. 세조는 신하들에게도 벌주를 자주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전기에는 새로 임명된 육조의 정랑과 좌랑에게 선임자들이 자질구레한 일들을 모두 맡겼다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술을 큰 잔으로 두세 잔 마시게 하는 벌주 풍습이 있었다. 만약 끝까지 사양하면 배척하여 동렬에 끼어 주지 않았다. 조광조와 함께 대표적인 사림파인 김식은 벌주를 무척 싫어한 인물이었다. 그는 벌주를 마시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일이 있다. 술을 멀리한 사람들 사실 술을 싫어하고 멀리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개국 직후 태조의 우대를 받았던 조운흘은 세상일에 아무런 욕심 없이 초연하게 살다간 사람이다. 고려 말에 전법총랑으로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물러가 경상도 상주의 노음산 아래에 살면서 일부러 미친 척하기도 하였고, 출입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타고 다녔다. 그러면서 술과 풍악을 멀리하고 세속을 희롱하며 고고하게 살았다. 단종 때의 재상 최부는 사람됨이 편안하고 조용하며 맑아서 음주와 장기, 바둑을 좋아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예문관 대제학이었던 윤형은 성격이 온순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음악과 여색을 즐기지 않았다. 특히 사람들이 가진 술을 보면 반드시 “이름을 더럽히고 일을 망치는 것으로는 이것보다 심한 것이 없다.”면서 음주를 경계하였다. 세조 때 의정부 좌참찬을 지낸 박중손은 스스로 계주명戒酒銘을 지어서 자신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세조 6년에 중추원사로 있다가 죽은 기건은 성품이 맑고 검소하고 곧았으며, 작은 행실도 반드시 조심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특히 지방 수령으로 부임한 뒤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술을 마시지 않을 정도로 모범적인 청백리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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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임금 잔혹사
조민기 | 책비 | 2014-06-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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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임금 잔혹사
조민기 | 책비 | 2014-06-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그들은 어떻게 조선의 왕이 되었는가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의 나열이 아니다 로맨스와 야사로 얼룩진 왕들의 이야기 또한 아니다 역사 속 그들이 얼마나 힘겹게 왕위에 오르고, 지켜내고, 또 빼앗기고 쟁취했는지... 조선 임금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생생히 보여준다.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왕의 모습은 어떠한가? 선왕으로부터 평화스럽고도 우아한 방식으로 왕위를 물려받은 뒤, 애민정신과 강력한 왕권으로 조선을 다스렸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조선의 임금이라는 자리는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조선의 왕자와 왕들은 치열하고도 냉정한 왕위 계승이라는 세계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왔다. 때로 그들은 목숨의 위험을 느끼며 왕위에 오르고 지켜내고 버텨내기도 했다. 이 책은 기존의 <조선왕조실록>의 나열이 아닌,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시선을 가진 역사책이다. 왕으로 태어난 사람과 왕으로 만들어진 사람, 왕자로 태어났지만 왕이 되지 못한 사람. 그들의 불안하고도 우아한 공존을 통해 진짜 조선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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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풍속화의 천재화가 김홍도
한국문화 편집국 | 이북스펍 | 2014-03-1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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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풍속화의 천재화가 김홍도
한국문화 편집국 | 이북스펍 | 2014-03-1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조선시대 위인들 그들을 조명한다.
조선시대 최고의 화원 김홍도. 실력만 좋은 화원이 아닌 김홍도는 당시 양반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상민, 중인, 천민들의 일상생활을 그린 풍속화가로서 대중들의 삶을 조명한 화가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위인이다. 또한 당시 화원세계는 무척 폐쇄적이었음에도, 실력 하나로 당대 최고의 화원이 된 김홍도의 삶은 매우 치열하고 열정적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위인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생각하게 하려고 이 글을 집필한다. 단원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 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 산수, 신선, 불화,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妙品)에 해당되어 옛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또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을 잘 그려내어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 규방, 농부, 누에 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문, 거친 산, 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틀리는 것이 없으니 옛적에는 이런 솜씨는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김홍도는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김홍도의 본관은 김해 이며, 그의 자는 사능, 호는 단원이다. 그래서 단원 김홍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단원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의 단원에서 따왔다. 조선 시대 정조 때 대표적인 화가로 산수화, 풍속화등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화가이지만 고사인물화, 신선도, 화조화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독창적인 회화를 구축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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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이우상 | 다할미디어 | 2014-02-20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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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이우상 | 다할미디어 | 2014-02-20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조선왕릉을 중심으로 조선왕조와 그 역사의 뒷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이다. 조선왕릉은 조선왕조 27대 왕과 왕비, 추존 왕과 추존 왕비의 능으로 총 42기에 이른다. 한 왕조의 능이 모두 보존되어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힘들다. 저자와 사진작가는 조선왕릉 곳곳을 누비며, 왕릉의 이모저모를 담았다.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는 조선왕가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조선왕조 518년을 되돌아본다. 저자는 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죽음은 최상의 법문이며, 그것은 곧 자비라는 조용한 깨달음을 전한다. 이 책은 조선왕조 시대를 다룬 충실한 역사서이다. 더불어 숨겨진 야사를 이끌어와 진실의 양면을 흥미롭게 재조명하는 하며, 왕릉답사 가이드 코너를 마련하여 가이드북으로의 활용도 또한 높였다. 조선왕실의 무덤이면서 문화유산인 왕릉을 답사하면서 조선왕조의 역사를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조선왕조 518년, 27대 역대 왕과 왕비, 추존 왕과 왕비가 있다. 이들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며, 현재 조선 왕릉은 42기가 있다. 왕의 사친과 왕세자, 그 비의 무덤은 13기가 있으며, 원(園)이라 부른다. 묘(墓)는 대군과 공주, 옹주, 후궁, 귀인 등의 무덤으로 64기가 있다. 통틀어 119기가 있는 것이다. 조선왕릉, 영원한 안식을 꿈꾸고 있는가 만백성 위에 군림하던 최고 권력자들, 내명부의 주인이 되기 위해 온갖 모략을 서슴지 않던 여인들, 왕가의 발치에서 숨죽여 살아가던 내시와 궁녀들. 한때 화려하고 찬란한 왕가를 이루었으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들이다. 그들은 과연 영원한 안식을 꿈꾸며 깊은 잠에 빠져 있을까? 진보한 시대를 향한 발걸음은 갈등과 분열의 저항에 끊임없이 맞서야만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평화와 안정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 지난 시대의 비극이 숱하게 재생된다. 저자는 직접 조선왕릉터를 누비며 옛 왕조가 넌지시 전해주는 ‘서늘한 교훈’을 체험한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부터 의친왕의 의왕묘까지 이 책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부터 의친왕의 의왕묘까지 조선왕릉으로 조선왕조 518년을 정리했다. 조선왕조 27대 왕과 그 일가들의 삶은 곧 조선의 역사이다. 어린 조카의 목숨을 빼앗고 왕위에 오른 냉혈한 세조는 어린 자식을 잃고 비극에 잠긴 슬픈 아비였다. 왕의 여자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장희빈은 사약을 받는 순간 훗날 왕의 자리에 오를 세자를 저주했다. 역사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알려진 이야기 속에 감추어진 이면에 맞닥뜨리게 된다. 더불어 조선왕가를 이루었으나 소리 없이 살아간 왕의 후손들과 내시궁녀의 삶도 빠뜨리지 않았다. 죽음은 곧 최상의 법문 빛과 어둠은 실존을 위해 서로를 위협하나 변증을 이루며 세계 안에 공존한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살았는가’ 라는 물음은 ‘어떠한 생을 마감했는가’와 다르지 않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으며, 죽음을 통해 인생은 완성된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죽음을 떠맡기고, 스스로도 죽음의 주인공이 된 그들의 삶을 돌아보며 저자는 삶과 죽음이 하나로 연결되며 결국 죽음이 최상의 법문임을 우리에게 전한다. 역사 기행과 도심 산책을 한꺼번에 왕릉 순례는 ‘죽음과 역사’라는 두 가지 화두와의 만남이다. 사색과 성찰, 휴식과 운동이란 부가가치도 뒤따른다. 조선 왕릉은 왕조 500년 역사의 타입캡슐이다. 대부분 경복궁을 중심으로 100리 안에 있다. 즐거운 소풍놀이다. 후손들에게 남긴 최고의 선물이다. 삶과 죽음으로 풀어본 조선왕조 500년 사를 통해 옛 왕조의 혼을 느끼고, 왕릉답사 가이드를 따라 왕릉터로 발걸음을 옮기면 역사 기행과 도심 산책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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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조실록으로 오늘을 읽는다
이남희 | 다할미디어 | 2014-02-12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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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조실록으로 오늘을 읽는다
이남희 | 다할미디어 | 2014-02-12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조선왕조실록'으로 오늘을 읽는다
- 오백년간 왕들조차 볼 수 없었던 진실의 기록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 총 1,893권 888책의 방대한 분량에 이르는 조선왕조실록이 우리와 가까워진 것은 조선왕조실록의 디지털화 작업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몇 년에 걸쳐서 열심히 조사해야 찾아낼 수 있는 자료를 단 몇 초 만에 검색해 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옥스퍼드대학의 조선시대 연구자 제임스 루이스(James Lewis) 교수가 '혁명'(This is a revolution!)이라 탄복했을 정도였다. "과연 조선시대에는 어떠했을까?", "거꾸로 조선시대라면 이런 일들은 어떻게 처리했을까?"이 책은, 『CD-ROM 조선왕조실록』 디지털화 작업에 직접 참여했던 저자가, 오늘날 일어나는 중요한 일들을 보면서 가졌던 물음들에 대한 답을 모색한 글이다. "오늘의 시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읽어보고자 한 것이고, 역으로 조선왕조실록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읽어보려 한" 시도였다. 이런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에 살아 있는 역사'를 만나게 되고, '역사를 통해서 살아가는 오늘'을 되새기게 된다.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이 지닌 의미와 가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오백년에 걸친 기록이라는 특성 그 자체도 그렇지만, 거기에 담겨 있는 내용의 다양함과 깊이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한 보물창고와 같다는 것, 퍼내도 퍼내도 결코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누구든지 자신의 보물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 등. 그런 만큼 이 책이 ‘조선왕조실록에서 보물찾기’ 놀이의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번에 내놓는 『조선왕조실록으로 오늘을 읽는다』는 기존의 『클릭! 조선왕조실록』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수정 보완하는 작업 과정에서 외형과 내용에서 달라진 점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관련된 사진 자료를 다양하게 수록했다. 이는 한국학중앙연구원『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사진을 촬영했던 유남해 선생님의 도움으로 다양한 사진을 함께 하여 이해의 폭을 넓게 했다. 조선시대 5백 년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은 단일 왕조사로는 세계에서 최장 기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앞에 언급했듯이 총 1,893권 888책의 방대한 권질卷秩에 이른다. 그 형식은 일기식으로 기록한, 이른바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이다. 하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기전체紀傳體, 기사본말체記事本末體 등의 형식을 채택하여 나름대로 다양한 서술 방식을 택하고 있다. 예컨대 『세종실록』에는 오례, 악보, 지리지, 칠정산七政算(역법서)이, 『세조실록』에는 악보가 실려 있다. 그 내용에서는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은 물론이고 각 분야에 걸쳐서 역사적 사실을 총체적으로 망라하고 있다. 더욱이 조선왕조실록은 정확한 사실적 기록이라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사관은 정론正論과 직필直筆을 생명으로 삼았다. 대신과 관료들은 물론이고 왕이라 해도 잘못이 있으면 직필로써 역사의 심판을 받게 하였다. 인물과 사건에 대한 사신의 논평 기사가 그것인데, 거기에는 국왕에 대한 비판 기사도 많다. 보복을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사관들의 신분은 철저하게 보장되어 있었으며, 또한 사초史草는 국왕이라도 마음대로 볼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우리 문화와 역사의 무궁한 보고寶庫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전통 문화 역시 시대에 걸맞는 형태로 재창조되어야 할 것이다. 전통의 현대화라 해도 좋겠다. 콘텐츠의 보고 조선왕조실록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보물찾기’ 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 책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조선의 문화와 생활, 제2부 조선의 사회와 유교, 제3부 조선의 법과 정치, 제4부 조선의 무역과 경제. 살인, 성과스캔들, 이혼과 재혼, 인사청탁, 언론자유, 탄핵, 자연재해, 국제무역, 외국인, 의관과 의녀, 왕실의 웰빙문화 등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슈들을 선택해서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을 인용해 가며 그 해법을 제시한다. 인용한 실록 기사에는 충실한 전거를 덧붙여 그 분야의 관련 자료로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으로 오늘을 읽는다』는 동북공정, 대운하, 한미 FTA, 영어 공용화, 독도 영유권 분쟁, 부동산 대책, 대학 입시 등 끊임없는 논쟁을 낳고 있는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슬기로운 해결책을 모색해 보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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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구한 이순신
한국문화 편집국 | 이북스펍 | 2014-03-2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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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구한 이순신
한국문화 편집국 | 이북스펍 | 2014-03-2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현대 사회인들에게 잊어서는 안될 우리의 역사와 우리 나라의 위대한 위인들을 다시 한번 소개하고자 이책을 쓰게 되었다. 충무공 이순신은 한국에 태어나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시호는 조선시대 정2품이상의 관리중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만 주는 것이다.그런 시호의 이름을 충무 내 몸이 위태로워도 위를 받드는 것을 ‘충무’ 쳐들어오는 적을 물리쳐 치욕을 막는 것을 ‘무’ 라 충하여 충무라 하였고 그것은 무관에게 가장 영예로운 시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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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뒤집은 황당무계 사건들
정구선 | 팬덤북스 | 2014-10-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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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뒤집은 황당무계 사건들
정구선 | 팬덤북스 | 2014-10-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점을 쳐서 수도를 결정하다, 임금을 몰래 미행한 사관,
젖비린내 나는 아이가 관리가 되다, 판서가 졸병과 함께 보초를 서다, 코끼리에게 밟혀 죽은 판서, 서울에 운하를 건설하려고 하다, 노비에게도 봉급과 휴가를 주다, 화폐 위조범을 찾아라, 외국 사신을 놀라게 한 불꽃놀이……. 조선판 ‘세상에 이런 일이’ 조선에서 일어난 흥미롭고 놀라운 사건들! 조선 시대라 하면 고루하고 답답한 시대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아주 흥미로운 시기였다. 《조선왕조실록》을 찬찬히 읽다 보면 조선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야말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야사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마치 ‘세상에 이런 일이!’라고 놀랄 정도의 역사가 가득하다. 《조선을 뒤집은 황당무계 사건들》은 실록 속에 숨어 있는 흥미진진하고 황당한, 때로는 놀라운 역사를 정리하여 담아낸 이야기보따리다. 책에 실린 이야기를 통해 조선의 생생한 역사 속으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 그동안 감추어진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아가 조선 시대, 조선 사람들에 대하여 좀 더 폭넓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책의 기본 배경은 조선 건국 직후인 태조 때부터 3대 태종 때까지이다. 해당 시기의 국왕과 왕실, 관료, 백성, 명나라 사신과 관련된 역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후대 왕의 연간에서 관련 일화를 첨부하기도 했다. 왕실에 그런 황당한 일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공신들은 고려 왕실의 후예인 왕씨들이 살아 있는 한 편히 발을 뻗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모반을 도모했다는 허무맹랑한 구실을 꾸며 왕씨들을 일망타진하였다. 조선은 태조 3년 9월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지만, 그 이전에는 계룡산 부근에 수도를 정하려다가 취소하였다. 다시 서울의 무악재 아래 신촌 일대로 옮기려다가 포기한 적도 있다. 한양에 수도를 정한 조선은 ‘왕자의 난’ 이후 개성으로 잠시 옮겼다가 태종 때 한양으로 재천도하였다. 한양으로 재천도하는 결정은 종묘에서 동전으로 점을 쳐서 정했다고 한다. 덕수궁이란 이름을 가진 궁궐은 엄연히 조선 건국 직후부터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1398년 10월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그가 머물던 궁궐을 태상궁이라고 불렀다. 정종 2년 6월에 당시 세자로 있던 이방원의 청에 따라 태상궁의 이름을 덕수궁이라고 고친 것이다. 신생 왕조를 안정시키고 기틀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콧대가 한껏 높아진 무신들을 억누르고 상대적으로 의기소침해 있는 문신들을 다독여 주어야 했다. 무관 출신인 태조 이성계와는 달리 과거에 급제한 문관 출신인 태종은 무관을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다. 태종은 무예를 한갓 미친 짓이라고 하기도 했다. 문무의 균형을 맞추려는 태종의 현명하고 원대한 정치적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조선 시대에는 재상 등의 고위직을 역임한 신하들이 사망하면 임금이 부의금을 하사하고,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 주며, 시호를 내렸다. 부의로 1품은 쌀과 콩을 아울러 60?100석, 정2품은 40?50석, 종2품은 30석 이하를 주었다. 1석을 2가마로 치고, 1가마를 80kg으로 환산하면 100석은 약 200가마로 16,000㎏이다. 당시 재상들은 정말 어마어마한 부의금을 하사받았던 것이다. 임금님의 지나친 부의금 때문에 나라 곳간이 거덜 날 정도였다. 사초는 사관이 임금이나 신하들의 언행을 날마다 기록한 것으로, 실록 편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초 자료였다. 사관들이 안심하고 직필하도록 실록을 편찬하기 전까지는 임금을 비롯한 그 누구도 사초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태조와 태종은 굳이 사초를 열람하려다가 신하들과 충돌을 빚었다. 고려 32대 왕으로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폐위되었다가 죽임을 당했다. 우왕에게는 모두 9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대부분 궁궐에서 쫓겨나 본가로 돌아갔다. 본가로 쫓겨난 왕비 중에는 우왕의 제8비였던 선비 왕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비는 본가로 쫓겨난 뒤 조선이 들어서자 판통례문사를 지낸 유은지와 재혼하였다. 한때 자기가 섬기던 왕의 부인을 아내로 삼은 것은 군신의 예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삼강오륜을 어지럽히는 짓이라는 여론이 거셌다. 태종이 어느 날 포천군에서 사냥을 하였다. 수행하던 사람들 가운데 6명이 숙소에서 쑥갓과 거여목처럼 생긴 독초를 잘못 먹고 갑자기 죽는 일이 벌어졌다. 소식을 들은 임금은 앞으로 자기의 식탁에 쑥갓과 거여목을 올리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관리들이 감히 이런 일을! 조선 초기에는 나이 어린 사람들이 관리가 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는 젖비린내 나는 아이가 관리가 되어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도 요즈음의 인사 청문회와 비슷한 서경署經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관리 후보자들의 신분, 조상, 과거 합격 여부 등을 조사하여 관리로서의 적합도를 검증하는 제도로, 서경을 통과하지 못하면 관리가 되지 못했다. 조선 초기에는 관청에 출근하지 않고 결근하거나 조퇴하는 관리들이 많았다.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매를 쳐서 징계하였다. 지방으로 전출되면 부모의 병을 핑계로 관직을 내던지고 내려가지 않는 관리들이 많아 큰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임금의 부름에 항상 응할 수 있도록 2품 이상의 재상들은 지방에 머물지 말고 한양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조선의 대간들은 한 가지 문제가 생기면 수없이 간언을 올리거나 상소를 올려 임금을 괴롭혔다. 태종은 참다못해 신하들이 세 번 이상 간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어이없는 일로 처벌을 받은 관리들이 많았다.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서 본인 이름 앞에 신臣 자를 붙이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된 관리가 있었다. 시호를 잘못 정했다가 교수형을 당할 뻔한 관리도 있었다. 문서나 본인 이름에 임금과 세자의 이름을 쓸 수 없어 이름을 두 번 바꾸어야 했던 공신도 있었다. 조선 건국 직후에는 저녁 8시경부터 새벽 4시경까지 4대문을 통과하거나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야간 통행 금지령을 실시했는데, 영을 어겼다가 파직된 대사헌도 있었다. 심지어 비가 많이 내려 농민들이 기르는 벼를 떠내려가게 했다는 죄로 수령을 파직하기까지 하였다. 태종 때 공조 전서를 지낸 이우가 일본에서 보낸 코끼리에게 침을 뱉었다가 밟혀 죽었다. 고려 후기의 대학자인 이제현의 증손자 이담이 미친개에게 물려 죽었다. 태종의 딸과 자기 아들과의 결혼을 단호하게 반대했다가 역적으로 몰려 노비로 강등된 전직 군수가 있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문신인 변계량은 20여 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맡으면서 크게 존경을 받았지만 집에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후처를 방에 가두어 두고 창구멍을 내어 음식을 주거나, 소변도 자유롭게 보지 못하게 하는 등의 박대를 하여 탄핵을 받았다. 궁녀는 일단 궁에 들어가면 왕의 여인이었다. 혹시 궁에서 나가더라도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없었다. ‘왕자의 난’을 치른 공신으로 태종의 총애를 받았던 조영무가 궁녀를 첩으로 삼았다가 많은 비난을 받았다. 조선 왕조는 신분 제도를 엄격히 하기 위하여 노비, 기생 등의 천인과 양인 간의 결혼을 건국 초기부터 강력하게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첨절제사를 지낸 정복주가 본처를 버리고 기생의 딸과 혼인하여 후처로 맞았다가 관직을 잃고 평민으로 강등된 일이 있었다. 조선 군대에는 돌을 던지며 싸우는 척석군이 있었다. 수군에서는 왜구를 추격하기 위해 쾌선 내지 경쾌선이라 불린 작고 빠른 쾌속선을 만들어 실전에 투입하기도 하였다. 백성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재판에 불만을 품은 여인이 임금이 어가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앞으로 뛰어들었다. 호위병과 부딪힌 여인은 임금 앞에서 크게 부르짖으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임금이 격노하여 곤장을 때리고 지방의 관노비로 삼도록 했다. 조선 초기에는 황제의 색깔이라고 하여 황색과 황색 옷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그 외에 흰색과 옥색, 회색의 옷도 입지 못하게 했다. 황색으로 보자기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다가 귀양을 간 사람이 있었다. 국가 소속의 공노비들은 봉급을 받고 휴가를 가기도 했다. 태종 때 처음 만들어 사용한 지폐인 ‘저화’를 위조하는 사람들이 많아 유통이 부진을 면치 못한 일도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징수하지 않는다. 조선 시대에는 무당에게도 세금을 거두었다. 국가에서 3년마다 한 번씩 무당의 명부를 작성하여 무세巫稅를 징수했다. 무세는 원래 매년 두 번 징수하였는데, 세종 5년부터는 매년 한 차례만 거두도록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경상도나 전라도, 충청도 지방에서 조세로 거두어들인 곡식이나 베 등을 주로 배를 이용하여 한양까지 운반하였다. 이를 조운이라 하였고, 그 배를 조운선이라 불렀다. 조운선이 풍랑을 만나 난파하거나 침몰하여 곡식과 사람을 잃는 사고가 매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태종 3년에는 조운선 34척이 한꺼번에 바다에서 침몰하여 천여 명의 수군이 몰사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한 적도 있었다. 조운선의 침몰은 인명은 물론 국가 재정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는 재난이었다. 조선 시대에 중요한 재산은 토지와 노비였다. 태종 때 남양군에 봉해지고 상의중추원사를 역임한 홍길민은 노비를 무려 천여 명이나 소유하였다고 한다. 노비로만 따지면 그는 아마도 조선 초기 최대의 거부가 아니었을까. 죽은 사람의 생식기를 잘라 가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태종 3년 5월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던 날, 황해도 봉산에서 어떤 남자가 소를 끌고 가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 이때 죽은 사람의 손가락과 생식기인 음경을 잘라 간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 시대에도 인명 보호 차원에서 오늘날의 삼심제와 유사한 삼복법三覆法을 시행하였다. 지방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발생하면 수령이 먼저 심리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다시 심리하여 중앙의 의정부에 보고하며, 의정부에서는 세 번 심리하여 임금에게 세 번 아뢴 다음에 사형을 결정하도록 했다. 비록 사형에 처할 만한 죄를 지었더라도 죄인이 독자면 살려 주는, 이른바 독자존류양친법獨子存留養親法이라는 법규가 있었다. 외아들이 죽으면 늙은 부모를 봉양할 사람이 없어지기에 살려 준 것이다. 조선 시대의 형벌 중에는 곤장으로 죄인을 때리는 장형이 있었다. 장형은 죄의 경중에 따라 최하 60대에서 최고 100대까지 치도록 했다. 때로는 곤장을 60~70대 맞고도 죽는 사람이 있었으며, 100대를 맞으면 대개 사망에 이르렀다. 곤장 100대는 치사율이 거의 100%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사라진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형벌이 많았다. 몸을 여러 조각으로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 외에도 중국 고대에 행해진 오형 중 얼굴 등에 문신을 하는 묵형墨刑, 즉 자자刺字와 발꿈치를 베는 비형?刑이 행하여졌다. 중국 사신이 어떻게 그런 짓을! 전라도 장성의 길가에 큰 나무가 있었다. 사람들은 가지가 많다는 뜻의 ‘백지수百枝樹’라고 불렀다. 태종 때 명나라 사신 황엄이 지나다가 그 나무에 비밀스럽게 구리 못을 박아 놓았으나, 고을의 현감 허규가 못을 뽑아 버렸다. 황엄이 나무에 못을 박은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가 압승술을 썼다고 생각하였다. 원래 중국 사신이 오면 연회를 끝내고 기생으로 하여금 수청을 들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국 사신들은 가까이했던 기생을 못 잊어 사랑에 빠지기도 했고, 급기야는 기생을 중국으로 데리고 가려 하기도 했다. 금강산은 우리나라 최대의 명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금강산의 명성은 예전부터 중국에까지 퍼져서 조선에 오는 명나라 사신들마다 모두 금강산을 유람하려고 안달을 하였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중국에 막대한 공물을 보냈다. 물품 외에도 처녀와 환관 등의 사람들도 보내야 했다. 조선 초기에 명나라에서는 환관으로 쓰기 위해 화자, 즉 고자를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15회에 걸쳐 모두 200여 명의 화자를 바쳤다. 화자 외에 처녀도 보냈다. 중국에 보낸 처녀를 이른바 공녀라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때까지 80년간 모두 50차례에 걸쳐 수천 명 이상의 처녀들이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 조선 시대에는 태종 때부터 세종 때까지 20여 년간 7회에 걸쳐 100여 명의 처녀들이 명나라에 바쳐졌다. 후기에는 인조~효종 때 20여 명의 처녀들이 청나라에 끌려가야 했다. 명나라에 보내는 공물에는 말과 소도 있었다. 태종 4년에는 명나라에서 농삿소 1만 마리를 요구하여 여러 차례로 나누어 보내야만 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숭불 풍조가 남아 궁중에도 부처의 진신 사리 같은 사리가 많았다. 명의 3대 황제 영락제가 이것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였다. 태종과 세종이 궁궐과 각지의 사찰에 보관되어 있던 사리를 모아 모두 1,300여 과를 보냈다. 조선 초기에는 왜구들이 전국의 연안에 출몰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가는 일이 잦았다. 조정에서는 일본에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려고 여러 가지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태종 16년에 돌아온 전언충이라는 사람은 무려 21년 만에 귀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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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여인을 사랑한 신윤복
한국문화 편집국 | 이북스펍 | 2014-03-17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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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여인을 사랑한 신윤복
한국문화 편집국 | 이북스펍 | 2014-03-17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신윤복의 자료는 현재 많이 남아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마음에 남아 있고 그가 그린 미인도는 우리의 마음을 영원히 울립니다. 이제 그의 생애와 업적을 들여 보도록 하려 합니다. 당시 조선세계는 무척 폐쇄적이었음에도, 여인의 삶을 미 학적으로 그려내고 양반의 이중적인 모습을 냉정하게 그려낸 신윤복을 그려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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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짭짤한 한국사
김영한 | 지식과감성# | 2014-05-22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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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짭짤한 한국사
김영한 | 지식과감성# | 2014-05-22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짭짤한 한국사」만의 특징
1. 현직 인문계고등학교 교사의 체계적인 정리 및 상세한 해설 2. 쉽고 재미있는 내용정리, 재미있는 그림(삽화), 판서, 해설 강의의 체계적 구성 3. 한국사 내용정리에 이은 최신 한국사능력검정시험 3급 기출문제의 단원별 제시 4. 단원별 기출문제의 상세한 해설 : 짭짤한 포인트, 짭짤한 해설, 쌤의 한마디, 짭짤한 보너스 5.「짭짤한 한국사」 한 권으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중급은 물론 고등학교 한국사 내신 및 각종 모의평가에 대비 6. 학교모습이 담긴 행복한 교재 : 저자가 현재 담임을 하고 있는 고3 학생들과의 행복한 이야기가 곳곳에 그려짐 이 책은 학교현장에서 다년간 학생들을 가르친 고등학교 교사의 모습이 담겨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 3급 준비는 물론 고등학교 한국사 내신 및 모의고사, 수능을 대비할 수 있도록 한국사 내용을 정리하였다. 단순한 요약정리가 아닌 자세한 정리, 재미있는 그림, 교사의 판서, 해설 강의가 함께 들어있어 학교수업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또한 내용정리에 이은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의 최신 3급 문제를 단원별로 제시하였고, 문제와 관련된 해설을 자세히 하여 혼자서도 충분히 학습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저자는 그동안 학생들이 어려워한 주제나 역사용어를 쉽게 설명하고 풀어서 해설하여 수험생들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학교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의 쉬운 내용정리 뿐만 아니라 고3 담임을 하고 있는 저자(김영한)가 학생들과 보낸 추억들을 기록한 학교이야기가 중간 중간에 쉬어가는 코너로 제시되어 책을 보는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중급을 응시하고자 하는 사람과 고등학교 학생 및 교사가 되고자 하는 모든 분들에게 적극 권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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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천년의 바다 수달장군
극단 갯돌 | (주)크레펀 | 2014-09-0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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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천년의 바다 수달장군
극단 갯돌 | (주)크레펀 | 2014-09-0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고려 건국시기 서남해얀을 장악하여 해상세력의 수장이라 할 수 있었던 능창의 이야기를 극화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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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추자씨 어디가세요
극단 갯돌 | (주)크레펀 | 2014-09-0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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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추자씨 어디가세요
극단 갯돌 | (주)크레펀 | 2014-09-0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전라도 할머니의 굴곡진 삶을 절묘한 해학과 씻김의 민족연희미학 논법으로 유쾌한 환타지 마당을 그려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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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퍼펙트 조선왕조 1 - 정도전과 조선왕조에 숨겨진 역사의 현장
이준구, 강호성 | 스타북스 | 2014-04-0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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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퍼펙트 조선왕조 1 - 정도전과 조선왕조에 숨겨진 역사의 현장
이준구, 강호성 | 스타북스 | 2014-04-0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민본(民本)을 가슴에 새긴 선구자 정도전
그가 설계한 이상 국가 조선에 담긴 뜻 500년 존속의 기틀을 만든 정도전이 이 시대 주목받는 이유 백성을 최우선으로 삼아 정도전이 기획하고 설계한 나라 개국부터 몰락까지, 깔끔하게 압축한 조선의 역사 지금은 조선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이 크지만 우리는 조선왕조가 500년 넘게 존속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500년 넘는 역사가 지속되도록 나라의 정치 이념을 확립하고 법을 정비하고 왕궁과 수도를 기획하고 설계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정도전이다. 『퍼펙트 조선왕조』는 고려 말 혼돈의 시대에 개혁으로 왕조를 유지하고자 한 세력과 왕조를 뒤엎어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자 한 세력의 충돌로부터 시작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까지를 처지지 않는 시원한 속도감으로 전개하고 있다. 기계적으로 서술한 지루한 역사 연대기가 아니라 핵심 사건을 이야기로 풀어 역사를 쉽게 이해하게 만드는 작가의 저력이 뛰어나다. 각 장은 주제별로 연관이 있는 왕 별로 묶어 기록함으로써 시대 변천의 이해를 더 쉽게 했다. 이는 지금까지 굳어진 역사적 오해와 편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who’ 코너에서는 인물들의 세부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었고 ‘talk about’ 코너에서는 왕, 왕비, 궁녀, 궁중 생활의 비밀, 의상ㆍ궁궐ㆍ국가기관에 대해 궁금증과 비밀을 해소하고자 하였으며 그 외 조선의 키워드를 15가지로 분류하여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알도록 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에 관한 54편의 드라마를 제목뿐 아니라 간략한 줄거리까지 함께 기술한 이유는, 대중적 관심을 끄는 드라마가 ‘진짜 조선’의 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2014년 정도전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 정도전이 지금,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어지러운 이 시대의 극복을 바라는 국민들의 뜨거운 열망에 정도전의 사상과 그가 행한 무수한 일들이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 일등공신은 역시 공중파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정도전〉인 듯하다. KBS 드라마 〈정도전〉은 그동안의 판타지나 로맨스, 여인들의 암투가 대부분인 사극에서 벗어나 사실 중심의 정통 사극을 표방하고 있다. 최대한 사실에 근접해 스토리를 전개하기 위해 드라마 관계자들은 역사학자 이덕일에게 특강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정치의 본질을 생각게 하는 이 드라마가 이토록 반향을 일으키고 있음은, 우리의 과거를 바로 알고 싶은 열망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이며 현재를 이해함으로써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반증일 터이다.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은 복종하고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배반하게 된다” 정도전이 조선을 세웠다고 하면 “무식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사실이 그렇다. 정도전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기획하고 설계한 최고의 브레인이었다. 그 스스로가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 한(漢)의 고조(유방)와 장량의 관계에 비유하며 “한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라고 진심을 흘리기도 했다. 물론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한 표현이지만, 여기에는 이성계의 물리력을 이용하여 정도전 자신이 이상 국가를 설계해 냈다는 자부심이 들어 있다. 그만큼 정도전은 천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더해 민심(民心)을 천심(天心)처럼 생각하는 시대에 맞지 않게 진보적이고 따듯한 마음을 함께 갖고 있었다. 이성계는 정도전이 없었다면 새 왕조의 임금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정도전은 이성계가 없었다면 이상 국가를 실현할 기회를 절대 얻지 못했을 것이다. 13세기 국제 판도에서 보인 고려의 굴욕, 급격히 돌아가는 세계정세 속에서 좁은 소견과 사심으로 자기들만을 위해 국가를 주무르던 왕족들, 한 나라의 몰락, 그로부터 500년을 이어갈 새로운 나라의 탄생. 그 한가운데 정도전과 이성계의 결단이 있었다. 가십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전락하지 않고 재미와 호기심을 충족시킨 것은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퍼펙트 조선왕조』에는 우리의 과거에 대한 의문을 해소해 줄 수 있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우리의 선조들이 했던 순간순간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나타났는지를 보면, 외세에 끼이고 남북은 분단되어 있는 현 상황이 오버랩되면서 지금의 우리들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를 떠올리게 된다. 수많은 희생 끝에 이상국가를 만들어 보자고 하여 수립된 국가가 거듭하여 피를 부르고, 이전 왕조와 마찬가지로 허례와 사욕을 좇고, 당쟁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좁은 소견을 가진 인물들에 둘러싸여 발전이 막히고, 꽉 막힌 사고의 결과 나라는 오욕으로 점철되어 멸망하고 마는 자가당착의 반복. 조선왕조의 역사는 인간이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의(義)를 관철해 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 그것은 다시, 우리의 앞으로의 선택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으로 이어진다. 한심한 이유들로 대의는 생각지도 않던 고위 사대부들의 작태를 보면 가슴속 울분이 끓어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또 반대파라 할지라도 대의를 위해 뜻을 합하는 관료가 적고, 성숙한 민심이 힘을 합해 주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여실히 느끼게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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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퍼펙트 조선왕조 2 - 정도전과 조선왕조의 숨겨진 역사의 현장
이준구, 강호성 | 스타북스 | 2014-04-0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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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퍼펙트 조선왕조 2 - 정도전과 조선왕조의 숨겨진 역사의 현장
이준구, 강호성 | 스타북스 | 2014-04-0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민본(民本)을 가슴에 새긴 선구자 정도전이 설계한 조선이
파벌 간 권력 싸움으로 몰락의 길을 내걷는 500년의 곡절 개국부터 몰락까지 깔끔하게 압축한 조선의 역사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은 복종하고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배반하게 된다” 지금은 조선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이 크지만 우리는 조선왕조가 500년 넘게 존속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500년 넘는 역사가 지속되도록 나라의 정치 이념을 확립하고 법을 정비하고 왕궁과 수도를 기획하고 설계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정도전이다. 『퍼펙트 조선왕조』는 고려 말 혼돈의 시대에 개혁으로 왕조를 유지하고자 한 세력과 왕조를 뒤엎어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자 한 세력의 충돌로부터 시작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까지를 처지지 않는 시원한 속도감으로 전개하고 있다. 기계적으로 서술한 지루한 역사 연대기가 아니라 핵심 사건을 이야기로 풀어 역사를 쉽게 이해하게 만드는 작가의 저력이 뛰어나다. 각 장은 주제별로 연관이 있는 왕 별로 묶어 기록함으로써 시대 변천의 이해를 더 쉽게 했다. 이는 지금까지 굳어진 역사적 오해와 편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who’ 코너에서는 인물들의 세부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었고 ‘talk about’ 코너에서는 왕, 왕비, 궁녀, 궁중 생활의 비밀, 의상ㆍ궁궐ㆍ국가기관에 대해 궁금증과 비밀을 해소하고자 하였으며 그 외 조선의 키워드를 15가지로 분류하여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알도록 하였다. 가십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전락하지 않고 재미와 호기심을 충족시킨 것은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퍼펙트 조선왕조』에는 우리의 과거에 대한 의문을 해소해 줄 수 있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우리의 선조들이 했던 순간순간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나타났는지를 보면, 외세에 끼이고 남북은 분단되어 있는 현 상황이 오버랩되면서 지금의 우리들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를 떠올리게 된다. 수많은 희생 끝에 이상국가를 만들어 보자고 하여 수립된 국가가 거듭하여 피를 부르고, 이전 왕조와 마찬가지로 허례와 사욕을 좇고, 당쟁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좁은 소견을 가진 인물들에 둘러싸여 발전이 막히고, 꽉 막힌 사고의 결과 나라는 오욕으로 점철되어 멸망하고 마는 자가당착의 반복. 조선왕조의 역사는 인간이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의(義)를 관철해 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 그것은 다시, 우리의 앞으로의 선택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으로 이어진다. 한심한 이유들로 대의는 생각지도 않던 고위 사대부들의 작태를 보면 가슴속 울분이 끓어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또 반대파라 할지라도 대의를 위해 뜻을 합하는 관료가 적고, 성숙한 민심이 힘을 합해 주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여실히 느끼게 만든다. 조선왕조를 다룬 54편의 드라마 bonus book 4에 실린 <조선왕조 역사 드라마 가이드>는 우리나라 텔레비전 방송에서 조선왕조를 다룬 드라마 54편을 시기별로 나열해 놓았다. 드라마 제목, 간략한 시대 배경과 줄거리를 비롯해 방송 연도, 시청률, 출연진까지 기재해 방송된 시기에 따른 주제와 배우들의 관심도와 인기도 유추해 보는 쏠쏠한 재미가 있다. 54편의 드라마를 제목뿐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해 요약본으로나마 기술한 이유는, 대중적 관심을 끄는 드라마가 ‘진짜 조선’의 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518년은 우리에게 해답을 구할 물음을 계속해 제시해 준다 태조가 방원을 세자로 세웠다면, 문종이 적자 계승의 원론에 얽매이지 않고 동생 세조를 왕위에 오르도록 했다면, 성종이 제헌왕후 윤씨를 폐비시키지 않았다면 (연산군은 다른 왕이 되지 않았을까), 숙종이 장희빈을 보듬었다면 (경종이 후사를 낳을 수 있지 않았을까), 경종이 후사를 낳아 영조가 왕이 되지 않았다면, 영조가 사도세자에 대한 교육 방식을 달리하고 이간질하는 노론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정조가 유교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정순왕후를 평민으로 강등했더라면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주체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을까),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가 자신들의 자리보전이 아닌 나라와 백성을 위해 반 발자국씩 양보했다면 (일제 강점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을까)……. 나라를 퇴보시킨 과정들, 무수한 고통과 불행을 부른 사건들을 보며 안타까움과 물음을 갖는다면, 그 자기성찰이 작금의 난세를 헤쳐 가는 분명한 판단력을 갖게 하리라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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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품바품바
극단 갯돌 | (주)크레펀 | 2014-09-0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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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품바품바
극단 갯돌 | (주)크레펀 | 2014-09-0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각설이들이 세상을 떠돌며 해학과 풍자, 넘치는 신명으로 풀어 쓴 마당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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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풍랑
극단 갯돌 | (주)크레펀 | 2014-09-0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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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풍랑
극단 갯돌 | (주)크레펀 | 2014-09-0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섬사람들의 삶과 문화는 물론 남도사람들, 전라도 문화 특유의 역동적인 신명을 마당극의 형식을 빌어 표현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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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프랑스 신부가 쓴 조선 통사
최두환 | 한국문학방송 | 2014-01-28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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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프랑스 신부가 쓴 조선 통사
최두환 | 한국문학방송 | 2014-01-28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꼬레(Coree)! 통상 코리아(Corea/Korea)라고 부르는 그 조선(朝鮮)의 역사!
이 책은 프랑스 신부 뒤 알드(P. Du Halde: 1674~1743)가 1735년에 저술했던 《The General History of the China》[중국통사(中國通史)](전4권)의 제4권에 적혀있는〈The Abridgment History of Corea〉[조선략사(朝鮮略史)]인데, 이를 건국대학교 신복룡 교수가 1985~1986년 사이 미국 조지타운 대학(Georgetown University)에서 수학(修學)할 때, 그곳 귀중본 도서실(貴重本 圖書室)에서 복사한 것을 번역하여 1999년에 서울 집문당에서 《한말외국인기록 10?11?12》에 합본(合本)된 《조선전》이란 제목으로 발행한 바가 있다. 나는 2000년에 《하멜 표류기》 원문과 이 《조선전》 원문을 신복룡 교수님께 구득(求得)하게 되었으니, 뒤늦으나마, 그 후의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이 책은 본디 뒤 알드가 여러 선교사들이 동양을 방문하여 보고 듣고, 체험한 것과 여러 자료들을 예수회(Jesuits)에 보내온 것을 1차 편집하였다가, 32년 동안 외국에서 지냈으며, 그 10년 동안은 북경에서 예수회 수장(首長)으로 봉직했던 꽁땅셍(P. Contansin) 신부가 빠리(Paris)에 1년간 체류(滯留)하면서 뒤 알드 신부의 저술에 수정(修訂)을 하여 표지와 같은 긴 제목으로 1735년 빠리에서, 1736년에 헤이그(The Hague)에서, 1741년에 런던의 왓스(J. Watts)사에서, 1742년에 제2권을 영어로 번역하여 런던에서 출간하였고, 1747~1749년에 독일의 로스톡(Rostock)사에서 출간되었는데, “영어 번역자는 여러 가지를 삭제했다.”고 신복룡 교수가 그 “역주자 머리말”에서 밝힌 바 있다. 이 글은 비록 프랑스어 원문을 구하지 못하고, 영어로 중역된 브룩스(R. Brooks)의 글을 대본(臺本)으로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것만으로도 고유명사 : 지명?인명과 그 상관관계 등을 고려하여 그 태생적?원천적 본질부터 검토하면서 다시 번역해 보니, 그 역사지리적 환경은 결국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조선이었다. 이런 결론은 필자가 이미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속의 12줄 388자를 번역한 바, 그 지도의 모형은 한반도였으나, 그 글 내용은 중원대륙임을 《대동여지도에서 낙타전쟁》(집문당, 2003)으로 펴낸 바 있고, 제주를 통하여 조선에 왔다가 13년 28일간(1653. 8. 16?1666. 9. 14) 억류생활에서 탈출했다는 것에 대해 그들은 한반도에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았다고 《새롭게 고쳐 쓴 하멜 표류기》(우석출판사, 2003)라는 책을 발간한 바가 있다. 이 《조선통사(朝鮮通史)》 자체도 그 내용에서 거의 마찬가지였음을 발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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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피바람 인수대비 (상)
이은식 | 타오름 | 2014-01-1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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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피바람 인수대비 (상)
이은식 | 타오름 | 2014-01-1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세상의 모든 원리는 질서와 양보와 용서를 요구하고 있다. 오직 자기 중심으로 되어주길 바라는 것은 결코 그 열매가 달지 못하듯, 정해진 선을 넘나드는 사람은 참인격자라 평가하지 않는다 장독안에든 쥐를 잡기위해 그독을 깨었다면 무엇이 남았겠는가 한사람의 지나친 욕망으로 인하여 피바람의 역사는 기록되고 있다 이는 바람직한 역사도 유산도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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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기행
조유전,이기환 | 책문 | 2014-01-1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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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기행
조유전,이기환 | 책문 | 2014-01-1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고고학자 조유전과 이기환의 한국사 기행
『한국사 미스터리』로 국내 인문학계에 고고학 바람을 일으킨 조유전, 이기환 저자가 또다시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지식기행 다섯 번째 책이다. 우리나라 전역에 흩어져 있는 대표 유적지의 발굴사와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문헌 지식(역사)과 발굴 지식(고고학)의 행복한 만남을 이뤄냈다. 이 책과 동행하다 보면 역사의 비어 있는 부분을 고고학이 안겨주는 역사적 상상력으로 메울 수 있으며, 우리 역사에 대한 통합적인 지식과 정보를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다. 발굴로 보는 우리 역사 답사기 국사 과목을 떠올리면 수많은 인물과 사건을 외우느라 밤을 새웠던 기억부터 떠오른다. 선사시대의 빗살무늬토기부터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지나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했던 국사. 수능 선택과목이 되면서 학교에서 힘겹게 명맥을 유지하면서도 ‘교양’ 하면 당연한 듯 ‘역사’ 분야를 떠올리는 것은, 바로 우리 국사가 수천 년 동안 쌓아 온 ‘역사적 상상력’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책문에서 출간한 『한국사 기행』은 역사적 지식에 기행이라는 테마와 엮어 우리 역사를 누구나 즐겁고 흥미 있게 접할 수 있도록 구성한 책이다. 전체 5부 30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문헌이 남아 있는 역사시대는 물론이고 우리 역사의 시원(始原)이 담긴 선사시대의 흔적까지 ‘발굴과 기행’을 통해 추적했다. 충청도 장선리에서 출발해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거쳐 경상남북도와 강원도를 거쳐 경기도 연천에서 끝나는 이 장거리 여행에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역별로 한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발굴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을 따라 답사를 하다 보면 우리나라 전역의 역사를 ‘발굴’이라는 매체를 통해 둘러볼 수 있는데, 발굴 당시의 현장으로 종횡무진 이동하면서 담당자와 인터뷰도 하고 발굴비화도 들을 수 있다. 이런 고고학 발굴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같은 문헌을 통해 드러난 역사적 실체의 틈을 메우고, 후대 사람들이 선대와 보다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렇게 볼 때 이 책은 ‘발로 뛰는 역사 체험기’이자 ‘역사의 현장에서 보고 듣고 만지며 경험하는’ 대안 역사책이다. 이 30편의 지식기행에 동행하는 저자들은 ‘우리나라 고고학의 살아있는 증인’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조유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과, 오랫동안 문화재 전문 기자로 일해 온 《경향신문》의 이기환 부국장이다. 저자들은 이미 발굴했거나 지금도 조사하고 있는 주요 유적지를 해당 발굴 담당자들과 함께 답사하면서, 현장의 목소리와 발굴 에피소드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또한 해당 발굴과 관련된 역사적 지식과 상상력까지 덧붙임으로써, 발굴을 통해 우리 역사를 보다 쉽고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문헌 지식’과 ‘발굴 지식’의 행복한 동행 발굴을 통해 역사를 조명하고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책은 발굴 상황과 문화재 보존의 어려움까지 고스란히 담아냈다. 막 노출되기 시작한 고려시대 석곽묘 4기가 사업시행자에 의해 포클레인으로 밀린 이야기(서문)부터, 인골이 확인된 고인돌의 덮개돌이 조형물로 사용된(24장) 가슴 아픈 사례도 따끔하게 지적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발굴된 한 신축공사장에서는 건축주와 문화재 담당자들이 협조해서 ‘지하박물관’을 건설하는 것으로 매듭지어 짐으로써, ‘대규모 개발과 문화재 조사’가 윈윈할 수 있는 가능성도 언급했다. 발굴과 관련된 행복하고 즐거운 유적 발굴 소식과 더불어 훼손 상황까지 남김없이 드러냄으로써, 유적과 유물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실체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기록유산과 실체적 유산을 함께 보고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세상에 나왔다. 발굴을 통해 사라진 과거에 생명을 부여함으로써 예전부터 줄기차게 외쳐 왔던 우리나라 ‘반만 년의 역사’는 ‘최소 30만 년 전 아득한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고고학이란 학문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우리 역사가 반만 년이라고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을 것이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말처럼, 이 책은 발굴을 통해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자 매우 조심스런 시도다. 하지만 지금까지 역사가 고리타분하고 어렵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생각해 왔던 독자들이 있다면, 이 책을 통해 그런 고민을 일거에 날려버릴 수 있다. 그 속에는 ‘임나일본부설을 폐기해 버린 동래 복천동 고분군(14장)’처럼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내용도 있고, ‘고철에서 국보로 운명이 뒤바뀐 화순 대곡리 청동예기(10장)’에서 짜릿한 희열을 맛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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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의 마지막 표범
엔도 키미오 | 이담Books | 2014-08-2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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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의 마지막 표범
엔도 키미오 | 이담Books | 2014-08-2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한국의 마지막 표범』은 한국 표범이 사라지게 된 배경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본인인 저자는 한국의 전국 각지에서 표범의 흔적을 찾고 사라져버린 표범의 기록에 안타까움을 더하며 한국표범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지, 한국 표범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지 의문점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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