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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구사진 80년 영선못에서 비엔날레까지
강위원 | 도서출판 학이사 | 2014-04-10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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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구사진 80년 영선못에서 비엔날레까지
강위원 | 도서출판 학이사 | 2014-04-10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20대 초반 아마추어 사진가로 출발하여 줄곧 대구에서 살면서 사진학과 교수로 퇴임한 사진작가 강위원 씨가 대구지역의 사진역사 80년을 정리한 <대구사진 80년 -영선못에서 비엔날레까지>를 e- book으로 출간했다.
대구디지털산업진흥원의 지원으로 도서출판 학이사에서 발간한 이 전자책에서는 1933년 최계복 선생의 작품 <영선못의 봄>에서부터 2006년에 출범한 대구 사진비엔날레까지의 사진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1968년 월산예술학원에 입학하면서 사진에 입문, 대구사진비엔날레 출범에 기여하면서 부위원장과 운영위원장을 역임한 저자는 사진작가로서 아마추어와 전문가의 길을 동시에 체험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양쪽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대구사진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진계는 이러한 양쪽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만의 역사는 온전한 역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객관적으로 그 원형을 해치지 않으면서 서술하였다는 평가이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많은 자료를 남겨야 한다는 것은 저자가 평소 가지고 있던 소명이었으며, 작가와 작품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이나 후대의 영역이라는 생각에 유보하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2013년은 최계복 선생이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대구사우회를 결성한지 80주년이 되는 해로써 대구사진의 재도약을 모색하여야할 중요한 시기로 큰 의미를 갖는다. 대구는 한때 ‘사진의 수도는 대구’라고 불리던 시기가 있었으며 지금도 계속 사진의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대구사진 80년 -영선못에서 비엔날레까지>에는 잔잔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온 대구 사진계의 움직임들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하면서 그 맥락을 담은 것이다. 1933년 영선못의 봄에서부터 최근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까지 사진사적으로 중요한 사진들을 발굴하여 수록한 이 책에서는 대구사단의 형성과정과 정체성의 수립, 한국 최초의 국제사진살롱의 개최에서부터 국전과 동아콘테스트 등 한국사진사에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공모전에서의 역할, 1960년대 신문지상을 통한 격렬한 사진적 논쟁들은 대구사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초가 된다. 그리고 한국사진작가협회의 시작에서부터 대학에 사진학과의 설립, 현대사진영상학회, 민사협 등의 형성과정과 활동내용에서부터 비엔날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개인전과 개인사진집, 사진연감 등을 통한 대구사진의 모습 등은 대구사진이 학술적, 예술적, 국제적으로 발달해나가는 과정들을 보여준다. 또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강운구, 권중인, 최재홍, 구자호, 권부문, 조세현, 임영균, 이용환, 이상일, 구성수 등 향토출신 작가들을 별도의 장을 할애하여 소개함으로써 한때 ‘사진의 수도는 대구’가 과거의 영광뿐만 아니라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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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륙에 서다 - 2천년 중국 역사 속으로 뛰어든 한국인들
최진열 | 미지북스 | 2014-08-0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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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륙에 서다 - 2천년 중국 역사 속으로 뛰어든 한국인들
최진열 | 미지북스 | 2014-08-0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중국 대륙을 무대로 활약했던 불굴의 한국인들을 엄선하여 엮은 열전. 북위 황실과 몽골 제국의 중앙 정치를 뒤흔든 황후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 호령하던 위대한 장군, 중국 한 복판에 독립 왕국을 세웠던 군벌, 백척간두의 조국을 구한 일개 역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주인공들을 엄격한 고증을 거쳐 생생한 필치로 되살려 놓았다.
이역만리에서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위업을 성취한 사람에서부터 일신의 안위를 위해 조국을 판 사람까지 우리 역사에서 잊혀졌던, 때로는 비극적이고 때로는 희극적이었던 선조들의 다채로운 모습들을 복원하고자 저자는 여러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면서 민족주의적 감정에 부화뇌동 하지 않고, 객관적인 자료와 증거를 가지고 신중히 그러나 역동적으로 풀었다. 중국의 역대 역사서에서 발굴해낸 한반도 출신 인물들의 삶의 발자취! 동아시아 세계의 역동적이고 국경을 넘나드는 흥미로운 역사의 장면들! 중국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한국인의 열전(列傳) 『대륙에 서다: 2천년 중국 역사 속으로 뛰어든 한국인들』은 한나라에서 청나라 시대까지, 즉 고구려에서 조선 시대까지 지난 2천년 동안 한반도와 만주, 중국과 인도, 중앙아시아에서 치열하게 살다간 불굴의 한국인들을 엄선하여 엮은 열전(列傳)이다. 우리 선조들 가운데는 중국 대륙을 무대로 활약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껏 이들은 한국사와 중국사 모두에서 변방의 역사로 취급되어, 오랫동안 중국 역사서의 몇몇 페이지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최근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촉발된 한?중 역사전쟁으로 이들의 존재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사실 외국인에 대한 기록과 평가에 인색한 중국인들의 역사 서술 방식을 상기한다면, 중국의 역사서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시공을 초월할 만큼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이 옛 한국인들이 중국 대륙에서 겪었던 좌절과 고통, 역경과 영광은 마치 고선지 장군이 ‘세계의 지붕’ 힌두쿠시 산맥을 넘었던 것에 비길만했다. 저자 최진열 박사는 그동안 외면 받아왔던 역동적인 역사의 주인공들을 엄격한 고증을 거쳐 생생한 필치로 되살려 놓았다. 북위 황실과 몽골 제국의 중앙 정치를 뒤흔든 황후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 호령하던 위대한 장군, 중국 한 복판에 독립 왕국을 세웠던 군벌, 백척간두의 조국을 구한 일개 역관(譯官)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 -황제, 황후, 군인, 유학생, 승려, 역관, 표류자, 인질로 끌려간 세자 등-을 만나며 동아시아를 무대로 펼쳐지는 우리 역사의 장대한 스펙터클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대륙에 서다』는 중국사 전공자가 오직 사료에 근거하여 발굴해낸 성과인 만큼, 그 정확도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36장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지도 역시 역동적이고 트랜스내셔널한 동아시아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과연 중국 대륙을 지배했을까? 1980년대 재야 학계를 중심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 본토에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지금까지 ‘한민족의 대륙 지배설’은 역사학계의 뜨거운 화두가 되고 있다. 특히 강대한 민족사에 대한 대중적 열망과 결부되면서, 이러한 주장은 한반도에 국한되는 역사 서술을 넘어 북방 유목 민족의 역사까지 우리 민족사의 방계로 편입시켜야 한다는 논지로 확대되고 있다. 중국 고대사의 권위자인 저자는 이러한 논란을 정면으로 다루며 사료(史料)와 고고학적 증거에 근거하여 ‘대륙 지배설’의 실상을 밝힌다. ‘대륙 지배설’은 주요하게 고구려와 백제 두 가지 판본이 있다. 고구려의 사례로는 고구려 모본왕이 하북성과 산서성 일대를 침공하여 지배했다는 설과 광개토대왕이 지금의 북경 인근인 유주를 통치했다는 설이 있다. ‘백제의 요서 영유설’은 더욱 유명하다. 『남제서(南齊書)』「백제전」에 백제와 북위의 전쟁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국경을 맞대지 않은 백제와 북위가 어떻게 직접 싸울 수 있었을까? 북위의 군대는 기병 중심이므로 바다를 건너지는 않았을 것이고, 백제도 당시에 적이었던 고구려 땅을 경유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즉 이 기록이 이치에 맞으려면, 백제가 요서 지방을 점령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제서』에 따르면, 백제왕은 한술 더 떠서 자기 신하들을 산동성 일대의 태수로 임명해달라고 황제에게 요청하기까지 한다. 과연 백제가 중국 본토를 다스린 것이 사실일까? 저자는 여러 ‘대륙 지배설’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민족주의적 감정에 부화뇌동 하지 말고, 객관적인 자료와 증거를 가지고 신중히 판단하자고 말한다. 중국의 황후가 된 고구려 여인과 치열한 궁정 암투: 고조용, 고영 우리 선조들 중에도 중국 황후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고조영과 고영이다. 고구려에서 북위로 이주한 고조용은 북위 황제(효문제)의 후궁이었으며 비록 그녀가 죽은 후였지만, 그의 아들이 황제(선문제)가 되자 황후로 추존되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황후의 수렴청정과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해 태자의 친어머니를 살해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를 “자귀모사(子貴母死)”라고 한다. 말 그대로 “아들이 귀해지면 어머니는 죽는다.”는 뜻이다. 고구려 여인 고조용은 아들이 태자로 책봉되면서 이 관습의 희생자가 되었던 것이다. 또 다른 고구려 여인이자 고조용의 조카인 고영은 선무제(고조용의 아들)의 황후가 되었다. 자귀모사의 관례에도 불구하고 고씨 가문은 북위 황실과 복잡한 겹사돈 관계를 맺어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태자로 책봉된 효명제는 고영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고영은 자귀모사의 관행을 내세워 태자의 친어머니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태자의 친어머니가 황제의 친위대와 연합하여 먼저 거사를 일으켜 상황을 급반전시켰다. 고씨 가문은 숙청되었고 고영은 황후에서 강제로 쫓겨나 비구니로 전락했으며 결국 황제의 친어머니의 지시로 살해되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독자들은 오호십육국 시대에 고구려인이면서 중국 황제에까지 오른 고운, 원나라의 중앙정치를 쥐락펴락했던 고려인 기황후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당나라 전성기의 명장들: 고선지, 흑치상지 고선지와 흑치상지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 출신이지만 당나라에서 군인으로 활동하다가 불멸의 존재가 된 사람들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유민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자 당나라는 이들을 대륙 서쪽의 인구 희박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들은 곧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제국 변방의 수비에 차출되어 두각을 나타내었다. 로마 제국이 게르만 출신 군인들을 용병으로 썼듯이, 당나라도 유목 민족을 군대로 편성하고 그 우두머리를 번장(番將)으로 삼아 변방의 수비를 맡겼던 것이다. 당시 중국은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토번(지금의 티벳)으로부터 수도 장안을 방어할 필요성이 컸으며, 유라시아 대륙의 교역로인 비단길을 장악하기 위해 서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 중에는 당나라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들이 많았다. 흑치상지는 토번, 돌궐 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다. 원래 그는 백제 부흥운동의 핵심인물이었다. 그러나 백제인 내부의 분열과 당나라의 회유 속에서 그는 살아남기 위해 부흥운동을 배신하고 같은 백제인들에게 칼날을 돌려야 했다. 전장을 누비며 큰 공을 세웠던 흑치상지는 결국 최초의 여성 황제인 무측천이 주도한 공포정치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고선지 역시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서역에서 군 생활을 하며 경력을 쌓아갔다. 고선지는 “개의 창자를 먹는 고려놈(高麗奴)아!”라는 모욕을 듣고, 각종 모함을 당하면서도 중앙아시아 일대를 평정하는 대업적을 이루었다. 세계사에 보기 드문 명장이었으나 고선지도 비극적인 결말을 맞고 말았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장안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고선지는 결국 모함으로 억울하게 희생되고 말았던 것이다. 동아시아 바다를 주름잡던 신라인들: 장보고 당나라에서 용병으로 일하던 장보고가 당나라 해적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신라인들을 목격한 후 완도에 해군기지를 설치하여 해적 소탕에 나섰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장보고는 서해와 남해 해상의 교통망을 완전히 장악하고 신라, 당, 일본을 잇는 삼각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런데 왜 그는 처음에 신라 군인이 아닌 당나라의 용병이었던 것일까? 장보고는 6두품 출신이었다. 야심있고 뛰어난 청년들은 골품제의 벽에 부딪혀 신라에서는 꿈을 펼칠 수가 없었다. 당나라에서 장수로 이름을 날린 설계두와 장보고의 친구인 정년 모두 6두품 출신이었다. 그들은 폐쇄적인 신라 사회를 버리고 당나라에서 미래를 보았던 것이다. 풍운아 장보고의 일대기는 당시 국제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신라인들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신라인들의 조선술과 항해술은 세계 정상급이었으며 이러한 기술적 우위를 통해 신라, 당, 일본을 오가는 항로를 지배할 수 있었다. 중국의 동해안의 수많은 항구에서 신라인 집단 거주지 신라방(新羅坊)이 자치권과 치외법권을 누리며 들어섰다. 상대적으로 후진적이었던 일본 선단에서는 ‘신라신(新羅神)’을 항해의 수호신으로 모셨고, 심지어 9세기에는 신라 해적들이 동해를 주름잡고 일본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지만 흉포한 왜구(倭寇)가 존재하기 전에 ‘신라구(新羅寇)’가 먼저 있었던 것이다. 조선을 구한 역관: 홍순언 홍순언은 서얼 출신 역관으로 사신단의 통역을 맡아 여러 차례 조선과 명나라 사이를 오갔다. 그는 당시 조선의 지배층도 하기 어려웠던 두 가지 큰일을 일개 역관의 몸으로 해냈는데 그것이 바로 조선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종계변무(宗系辨誣)”와 임진왜란 때의 명나라의 파병 요청이다. 종계변무는 당시 조선의 중대한 외교 현안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왕을 시해하고 조선을 창건했다는 명나라의 기록에 대해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도록 바꾸어 달라고 탄원하는 것이었다. 한번은 홍순언이 중국으로 파견되었을 때 어려운 처지에 처한 한 중국 여인을 불쌍히 여겨 수중에 있던 3백 금(金)을 주고 말았다. 이 돈은 관청에서 빌린 돈으로 중국에서 물건을 사다가 조선에 되파는 형태의 장사에 사용될 자금이었다. 따라서 이 돈을 갚지 못한 홍순언은 공금 횡령죄로 옥에 갇히게 된다. 당시 선조 임금은 수차례 사신단 파견에도 불구하고 종계변무 문제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격노하며 이번에도 협상에 성공하지 못하면 수석 역관의 목을 치겠다고 교지를 내렸다. 목숨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역관들은 옥에 있는 홍순언을 찾아가 빚을 대신 갚아 줄테니 자기들 대신 명나라로 가서 종계변무를 해결해달라고 청했다. 1584년 명나라에 도착한 홍순언은 명 조정의 고위 관료인 석성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일전에 홍순언이 도와주었던 여인의 남편이었던 것이다. 석성은 종계변무를 처리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구원병을 요청하러 간 홍순언을 병부상서(오늘날의 국방장관)의 위치에서 크게 도와주어 결초보은 하였다. 물론 명나라의 파병은 중요한 전략적 결정이었겠지만, 실로 홍순언은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이 해내지 못한 중요한 외교 현안들을 일개 역관의 몸으로 해냈던 것이다. 명나라의 조선인 출신 대일전선 총사령관: 이여송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장군이었던 이여송은 여러 사극을 통해 ‘열심히 싸우지 않고 주색에 빠져있던 무능한 장수’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그는 아버지 이성량과 함께 명나라 최고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이여송은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으로 불리는 보하이의 난, 임진왜란, 양응용의 난 가운데 두 번의 전쟁에 참전해 큰 공을 세웠다. 그는 몽골, 타타르, 여진과의 전투에서 수차례 빛나는 전승을 올렸고,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명나라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 4만3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위대한 명장 가문이 사실은 선대에 중국으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명나라 대일전선 사령관이었던 이여송의 목표는 중국 본토로 진군하는 왜군을 막는 것이었지 조선의 영토를 수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전쟁에 수동적으로 대응했고, 그의 부하들은 약탈을 일삼았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 이성량은 조선을 정벌하여 직할 통치할 것을 황제에게 제안했다. 조선이 이러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견제하고자 했던 명나라의 다른 대신들 덕분이었다. 이여송 부자는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미 명나라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여송은 임진왜란 후에도 여진과 전쟁을 치렀고, 죽은 후에는 황제 만력제에 의해 영원백(寧遠伯)에 봉해졌다. 서구 문물에 취한 준비된 군주의 죽음: 소현세자 병자호란의 치욕,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조선은 세자를 인질로 보내야 했다. 26살의 소현세자는 스스로 인질이 되어 당시 청나라의 수도였던 심양으로 끌려갔다. 심양에서 세자 일행은 경제적 곤궁에 시달렸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소현세자는 관례를 깨고 몰래 상행위를 시작했다. 이렇게 모은 자금으로 청나라가 끝없이 요구하는 뇌물과 포로로 잡혀온 조선인들을 석방하는데 드는 비용을 충당했다. 뿐만 아니라 소현세자는 조선 조정과 청나라 사이에서 외교관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국제 정세를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기회를 얻었고, 청나라의 강성함을 몸소 목격하면서 조선의 준비된 군주으로서의 면모를 다져갔다. 북경으로 몸을 옮긴 소현세자는 독일 선교사인 아담 샬을 만나 서양의 문물과 학문을 접하게 된다. 그는 서양의 과학과 기술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이를 조선에 도입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인조와 서인 정권의 반응은 싸늘했다. 친명반청(親明反淸) 노선과 성리학 지상주의에 갇혀 있었던 조선의 지배층은 오랫동안 청나라에서 체류한 세자를 믿지 못했으며, 세자가 도입하고자 했던 서양의 문물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졌다. 그들은 국제 정세에 대한 세자의 더욱 넓은 시야를 이해할 수 없었고 청나라를 무조건 적대시할 수 없다는 세자의 견해를 거부했다. 심지어 인조는 오래전부터 소현세자가 청나라를 등에 업고 자신을 폐위시킬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다. 마침내 소현세자는 독살을 의심케하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세자의 안타까운 죽음과 함께 조선은 더 밝을 수도 있었던 미래를 함께 상실해버렸던 것이다. 선조들의 고난과 역경의 파노라마를 통해 동아시아의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다. 2천년이라는 지난한 세월동안 중국사와 한국사를 넘나들었던 수많은 인물들이 아직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오래된 사서의 한 페이지에 잠자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바로 그 사람들, 이역만리에서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위업을 성취한 사람에서부터 일신의 안위를 위해 조국을 판 사람까지 우리 역사에서 잊혀졌던, 때로는 비극적이고 때로는 희극적이었던 선조들의 다채로운 모습들을 복원하고자하는 시도이다. 그들 모두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다. 우리 선조들이 중국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시기는 주로 이민족이 대륙을 정복했던 시기와 코스모폴리탄 제국이 성립했던 당나라와 원나라 때였다. 명나라 때부터 중국은 쇄국 정책으로 전환하게 되는데, 이 시기는 한?중?일 모두 쇄국으로 돌아간 시기여서 선조들의 국제적인 활동 역시 눈에 띄게 많지 않았다. 또 중국이 분열했던 시기나 청나라를 제외한 이민족 왕조에서는 옛 한국인들이 관직과 군대 등의 분야로 쉽게 진출할 수 있었지만, 한족 왕조의 세력이 강력하던 시기에는 이주와 활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국제적으로 활동했던 선조들과 역동적인 동아시아 세계를 또 다른 차원에서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구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에서 이루어졌던 역대 해외 파병의 사례들도 다루고 있어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반면교사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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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역죄인, 역사의 법정에 서다
배상열 | 책우리 | 2014-10-24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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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역죄인, 역사의 법정에 서다
배상열 | 책우리 | 2014-10-24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악의 획을 그은 인물들, 역사가 그들을 심판하다
우리의 과거사를 치욕으로 물들인 역사상의 인물들을 돌아보는 역사교양서『대역죄인, 역사의 법정에 서다』. 이 책은 삼국 시대, 고려, 조선 등 총 3개장에 걸쳐 역사의 반역자들을 소환하고, 나름의 형량을 구형한다. 백성을 올바로 이끌고, 지도자로서 의무를 제대로 이행해야 할 자들이 자신의 임무를 망각함으로써 일어난 역사상의 사건 사고들을 만나본다. 저자는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자들을 낱낱이 고발 한다. 먼저 삼국 시대에서 기소된 자들은, 고구려를 멸망으로 이끈 영류왕, 나라를 위험에 방치한 의자왕 등이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천륜을 배반한 천추태후,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역사를 날조한 김부식과 개경파, 나라를 혼돈 속으로 몰아넣은 무신들을 소환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역사의 기록을 스스로 말살한 세조와 예종, 외척이라는 권력을 휘두른 문정왕후와 윤원형, 역사를 날조하여 재구성한 혜경궁 홍씨 등을 법정에 세웠다. 이들은 지도자로서의 도리를 망각하고 부끄러운 짓을 서슴지 않았으며, 끝내 중국 중심의 사관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날조했다. 국가의 자주성을 내팽개친 이들의 목적은,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것이었다. 저자는 아직까지도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반역자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과거의 반역자들을 되돌아보며 형량을 구함으로써 다시는 반역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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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한독립 운동가 안중근
한국문화 편집국 | 이북스펍 | 2014-05-12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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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한독립 운동가 안중근
한국문화 편집국 | 이북스펍 | 2014-05-12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1910년 100년전 우리 민족의 영웅은 일제로 부터 사형을 받았다. 사형이 집행되고 그의 유골은 아직까지 조국에 안치되지 못했고 이제 그는 테러리스트라는 오명을 받게 되었다. 그의 아들은 변절자가 되었고 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잊혀져 가고 있다. 우리들은 그를 다시 불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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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정혼녀
민갑완 | 지식공작소 | 2014-08-0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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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정혼녀
민갑완 | 지식공작소 | 2014-08-0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이 책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의 정혼녀였던 민갑완의 회고록이다. 민갑완은 구한말 주영공사를 지낸 민영돈의 장녀로, 열한 살 때 세자비로 간택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 파혼당하고 평생을 수절한 비운의 여인이다. 한번 간택되면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없다는 왕실의 법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 결혼시켜 영친왕과의 연을 끊으려는 일제의 집요한 공작을 견디다 못해 상하이로 망명한 민갑완은 외로운 이국땅에서 고독과 고통의 세월을 보낸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김규식 박사가 독립운동을 권유했지만 결혼하지 않고 평생 절개를 지키는 것을 일종의 독립운동으로 여기고 자신을 지킨 운명의 여인 민갑완. 영친왕, 마사코(이방자) 공주와 함께 구한말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이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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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도선국사 숨결 따라가는 한국의 비보풍수
김려중 | 지식과감성# | 2014-07-3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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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도선국사 숨결 따라가는 한국의 비보풍수
김려중 | 지식과감성# | 2014-07-3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우리나라 유적지의 비보풍수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서울/경기도/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제주도로 나누어 각 지역별로 우리나라의 어떤 유적지가 있는지 살펴보고 각 유적지에 얽혀 있는 설화와 그곳의 특색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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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독도 객관식 문제연습 - 독도과거대회 대비용 최초 문제집
김명기 | 이담Books | 2014-07-02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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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독도 객관식 문제연습 - 독도과거대회 대비용 최초 문제집
김명기 | 이담Books | 2014-07-02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독도 객관식 문제연습』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간되는 독도 관련 객관식 문제집이다. ‘독도과거대회’ 대비할 수 있다. 독도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습득할 수 있고, 우리나라에 대한 애국심을 키울 수 있다. 특히 영토 분쟁이 있는 ‘독도’가 가지고 있는 중요성과 세계와 어떤 문제가 벌어지고 있는지 사회적 이슈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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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독도 이야기
한국문화 편집국 | 이북스펍 | 2014-05-10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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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독도 이야기
한국문화 편집국 | 이북스펍 | 2014-05-10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독도는 우리땅' 이라는 것에 반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 역사왜곡에 대처하려면 독도에 대한 이해가 높아야 하지만 우리는 독도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책을 독도에 관심있는 많은 학생들에게 추천한다. 독도에 대한 간편하지만 세심한 에세이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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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동아시아 속 고려사 1
이윤섭 | 이북스펍 | 2014-07-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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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동아시아 속 고려사 1
이윤섭 | 이북스펍 | 2014-07-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북으로는 유목 제국과 접하고, 서로는 바다를 통해 중원의 왕조와 연결되어 있던 고려는 동아시아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우월한 무력으로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던 유목국가나 월등한 경제력과 앞선 정치 문화적 힘을 바탕으로 유목국가의 침략을 막던 한족 국가는 모두 고려를 우방으로 삼으려 했고 최소 중립 세력으로 남게 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국제 역학 관계 속에서 고려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을 해 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독립국가로 정체성을 지켜내었다.
고려는 세계제국을 건설한 몽골과 30년간 항쟁하다가 장인과 사위 관계를 맺었다. 이는 한국문화가 세계문화에 전면적으로 개방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가 몽골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많은 고려 난민과 포로들이 만주의 요동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고, 이들은 이전부터 거주하던 발해인과 더불어 요동 주민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이로 인해 고려의 영토 개념은 요동 지역을 아우르기에 이르렀는데, 고려가 말기에 수차례에 걸쳐 요동원정을 단행한 것도 이러한 영토 관념에 따른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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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동아시아 속 고려사 2
이윤섭 | 이북스펍 | 2014-07-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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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동아시아 속 고려사 2
이윤섭 | 이북스펍 | 2014-07-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북으로는 유목 제국과 접하고, 서로는 바다를 통해 중원의 왕조와 연결되어 있던 고려는 동아시아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우월한 무력으로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던 유목국가나 월등한 경제력과 앞선 정치 문화적 힘을 바탕으로 유목국가의 침략을 막던 한족 국가는 모두 고려를 우방으로 삼으려 했고 최소 중립 세력으로 남게 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국제 역학 관계 속에서 고려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을 해 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독립국가로 정체성을 지켜내었다.
고려는 세계제국을 건설한 몽골과 30년간 항쟁하다가 장인과 사위 관계를 맺었다. 이는 한국문화가 세계문화에 전면적으로 개방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가 몽골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많은 고려 난민과 포로들이 만주의 요동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고, 이들은 이전부터 거주하던 발해인과 더불어 요동 주민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이로 인해 고려의 영토 개념은 요동 지역을 아우르기에 이르렀는데, 고려가 말기에 수차례에 걸쳐 요동원정을 단행한 것도 이러한 영토 관념에 따른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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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동아시아 속 고려사 3
이윤섭 | 이북스펍 | 2014-07-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159 |
[역사] 동아시아 속 고려사 3
이윤섭 | 이북스펍 | 2014-07-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북으로는 유목 제국과 접하고, 서로는 바다를 통해 중원의 왕조와 연결되어 있던 고려는 동아시아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우월한 무력으로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던 유목국가나 월등한 경제력과 앞선 정치 문화적 힘을 바탕으로 유목국가의 침략을 막던 한족 국가는 모두 고려를 우방으로 삼으려 했고 최소 중립 세력으로 남게 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국제 역학 관계 속에서 고려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을 해 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독립국가로 정체성을 지켜내었다.
고려는 세계제국을 건설한 몽골과 30년간 항쟁하다가 장인과 사위 관계를 맺었다. 이는 한국문화가 세계문화에 전면적으로 개방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가 몽골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많은 고려 난민과 포로들이 만주의 요동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고, 이들은 이전부터 거주하던 발해인과 더불어 요동 주민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이로 인해 고려의 영토 개념은 요동 지역을 아우르기에 이르렀는데, 고려가 말기에 수차례에 걸쳐 요동원정을 단행한 것도 이러한 영토 관념에 따른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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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목포의 눈물 1
극단 갯돌 | (주)크레펀 | 2014-08-2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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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목포의 눈물 1
극단 갯돌 | (주)크레펀 | 2014-08-2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1930년대초 목포의 기억을 더듬어 목포와 시대, 그리고 그 회한들에 귀를 기울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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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목포의 눈물 2
극단 갯돌 | (주)크레펀 | 2014-08-2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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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목포의 눈물 2
극단 갯돌 | (주)크레펀 | 2014-08-2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일제시대 목포항을 배경으로 한 조선인 부두하역 노동자들의 노동운동과 역사의 질곡 속에 깨져버린 남녀의 사랑을 씨줄과 날줄로 엮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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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뮤지컬 난영
극단 갯돌 | (주)크레펀 | 2014-08-2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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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뮤지컬 난영
극단 갯돌 | (주)크레펀 | 2014-08-2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의 생애를 담은 쥬크 박스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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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뮤지컬 사랑일레라
극단 갯돌 | (주)크레펀 | 2014-08-2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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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뮤지컬 사랑일레라
극단 갯돌 | (주)크레펀 | 2014-08-2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목포 유달산 장수와 처녀의 사랑이야기를 간직한 삼학도 전설을 새롭게 재구성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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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미수 허목
허찬무 | 진한엠앤비 | 2014-02-1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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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미수 허목
허찬무 | 진한엠앤비 | 2014-02-1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미수 허목』은 미수 허목 선생을 연구하여 정리한 책이다. 미수 선생은 대쪽 같은 선비 정신과 옛 것의 가치를 존중하고, 깊고 넓은 학문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는 그런 미수 선생이 무엇보다 예송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로만 기억된다는 걸 안타깝게 여겼다. 미수 선생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명함으로써 그의 사상과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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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미쳐서 살고 정신 들어 죽다
이경식 | 휴먼앤북스 | 2014-10-17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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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미쳐서 살고 정신 들어 죽다
이경식 | 휴먼앤북스 | 2014-10-17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조선에도 글로벌 스탠다드에 입각한 인물들이 있었다!
세종시대를 위시해 조선 500년 역사가 찬란한 문물을 꽃피웠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조차 조선의 결국이 일제 강점기로 이어졌다는 사실로 인해 자부심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김연아, 박지성 같은 스포츠스타의 선전과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한 삼성 등을 통해서만 우리가 한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의 역사를 잘 살펴보면, 비록 시대적 한계 때문에 뜻한 바의 완전한 성취에는 이르지 못했다 해도, 정치, 경제, 과학, 문화, 예술, 철학 등 모든 분야에서 서양의 위인들이 이루어낸 업적에 못지않은 찬란한 성취를 보여준 선조들이 있었다. 이른바 글로벌스탠다드에 입각한 세계적 인물들을 우리 역사 속에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고, 이들의 성취는 객관적으로도 세계사에서 충분히 빛나는 수준의 것이었다. 《미쳐서 살고 정신 들어 죽다》는 그런 조선의 위인들의 찬란한 성취를 서양 라이벌의 업적과 비교하는 형식으로 실증적이면서도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책이다. 한국사와 세계사의 그 팽팽하고 치열한 만남! -조선 후기 근대를 준비하며 시대를 주도한 찬란한 별들과 서양의 근대를 이끌었던 위인들의 역사 대화 최근 일본의 독도망언과 교과서 왜곡 문제로 다시 한 번 국사교육의 중요성이 대두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학입시에서 국사의 비중이 줄어들어 고등학교 역사교육은 외려 후퇴한 상황이라, 역사교육 강화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미쳐서 살고 정신 들어 죽다》는 한국사와 세계사의 위인들을 라이벌 형식으로 대비해 역사와 시대를 읽는 새로운 눈을 제공해주고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 또한 가지게 해주는 대중 역사 교양서이다. ‘조선 후기의 빛나는 별들과 서양의 라이벌’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미쳐서 살고 정신 들어 죽다》는 조선 후기, 근대를 준비하며 시대를 주도한 조선의 위인들과 서양의 근대를 이끌었던 위인들을 짝지어 소개하는 인물 열전이자 역사 대화이다. 시대를 바꾸려 한 조선과 서양 위인들의 생생한 비교를 통해 역사와 시대는 어떻게 움직이고, 위인은 어떻게 탄생하는지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한국사에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서양의 위인들 못지않게 탁월한 인재들이 풍성했다는 자부심을 얻게 될 것이다. 특히 이 책에서는 조선 후기 성리학적 세계관과 붕당정치의 폐해 속에서도 근대를 열어가기 위해 자신의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던 위인들을 만날 수 있다. 인체를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온 허준과 베살리우스, 당대의 소설로 봉건 타파의 깃발을 내건 허균과 세르반테스, 자화상으로 근대적 개인의 존재를 알린 윤두서와 렘브란트, 백과사전으로 계몽의 시대를 연 이익과 볼테르, 근대인의 존재를 정립한 홍대용과 칸트, 낭만의 냉정한 전략가 박지원과 괴테를 비롯해 박제가와 아담 스미스, 정조와 나폴레옹, 김홍도와 호가스, 정약용과 다윈, 흥선대원군과 빅토리아여왕, 전봉준과 링컨까지, 정치, 철학, 문학, 미술, 의학, 과학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조선과 서양 라이벌 열두 쌍의 삶과 사상, 그들의 업적과 한계를 비교해 역사를 보는 새로운 안목을 제시한다. “한국인과 한국 역사의 자부심을 읽는다!” -서양을 뛰어넘는 위대한 조선의 별들을 통해 역사와 시대를 다시 읽는다! -조선의 과학, 철학, 예술을 인물로 살펴본다! 서양 역사가 곧 세계사로 인식되는 교육을 받아오면서, 세계사적 업적을 낳은 것으로 인정받는 세르반테스, 볼테르, 렘브란트, 칸트, 괴테, 아담 스미스, 다윈, 링컨 등 서양의 위인들에는 익숙하면서, 정작 조선의 근대를 이끌려 했던 허균, 윤두서, 이익, 홍대용, 박제가 등 한국사의 찬란한 위인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익숙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에게 그 업적이 널리 알려진 서양의 위인들과, 그들과 유사하거나 대립되는 세계관으로 조선의 근대를 이끌었던 위인들의 삶을 병치시킴으로써, 우리에게도 서양의 위인들을 뛰어넘는 위인들이 있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가령 세밀한 인체 해부도를 통해 근대의학을 연 베살리우스와 동양의학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허준의 삶과 업적을 통해, 인간을 중심에 둔 근대의학의 기치를 올리는 데 동서양의 우열이 없었음을 여실히 알 수 있고, 조선의 의학 또한 정밀한 과학과 체계를 갖춘 것임을 깨닫게 된다. 비단 의학뿐 아니라, 철학과 과학, 예술 등에서도 근대 서구의 성취 못지않은 조선의 성취가 있었음을 분명히 목격할 수 있다. 단순히 위인의 업적만 나열한 것이 아니라, 위인의 삶을 전반적으로 다루며 당대의 시대상과 지배이념과의 투쟁 양상을 흥미롭게 서술해, 한 위인의 총체적 생애는 물론 위인의 삶을 만들고 규정하고 한계 지은 시대와 역사적 조건에 대한 안목도 얻을 수 있다. 유사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지닌 동서양 위인들의 삶을 이야기 형식으로 흥미롭게 재구성해 가독성이 높으면서도, 동서양 위인들의 운명을 가른 시대적 역사적 요소들을 정확하게 포착해서 비교하는 서술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대중적이면서도 수준 높은 역사 지식과 교양을 선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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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박연과 훈민정음
박희민 | 휴먼앤북스 | 2014-09-0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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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박연과 훈민정음
박희민 | 휴먼앤북스 | 2014-09-0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한글은 정말 세종이 창제했나? 진정한 훈민정음 창제자는 박연이다!
한글날 556돌을 맞아 훈민정음의 창제자가 세종이 아니라 난계 박연이라고 주장하는 책이 출간되었다. 밀양박씨 난계파 후손인 박희민 씨가 쓴 《박연과 훈민정음》이 바로 그 책이다. 저자는 애초 《난계유고》 증보판을 내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중, 《난계유고》와 《세종실록》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난계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확신하고 9년여에 걸친 연구 끝에 이 책을 펴내게 되었다. 세종 주도, 집현전 학자들의 보조로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고 통용되어 온 상식에 반기를 든 셈이다. 저자는 9년여에 걸친 연구 끝에 찾아낸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 사실의 근거를 제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 창제의 모든 영광이 세종에게 돌아간 정황과 이유 등을 분석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근거로 저자는 《세종실록》의 기록과 《난계유고》의 상소문을 제시한다.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최만리의 상소에 대한 세종의 반박논리가 《세종실록》 세종 26년 2월 20일의 기록에 나온다. 이 반박논리에 훈민정음을 창제한 사람의 세 가지 조건이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것. 그것은 첫째, 운서를 아는 사람, 둘째,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인지 아는 사람, 셋째, 백성에게 훈민정음으로 된 삼강행실을 반포하자고 주장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율려신서》와 《홍무정운》 등 운서에 정통하고, 사성칠음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으며, 《난계유고》의 1번 소에서 ‘널리 가례와 소학, 삼강행실을 가르치고, 오음정성으로 풍속을 바로잡자’며 ‘훈민오음정성이정민풍(訓民五音政聲以正民風)’을 주장한 박연이야말로 훈민정음의 진정한 창제자라고 밝힌다. 박연이 각각의 자격요건을 갖추었다는 역사적 근거와 정황 또한 분석하고 있다. 특히 《난계유고》 1번 소는 그간 박연을 위대한 음악가로만 본 탓에 ‘방음부정(方音不正)’이라는 어구를 ‘음악이 바르지 아니하여’로 해석하였으나, 조선 초에 음악은 악(樂)이라 하였고, 말은 음(音)이라 하였기 때문에, 바른 해석은 ‘우리말이 바르지 아니하니’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훈민오음정성이정민풍(訓民五音政聲以正民風)’을 주장하는데, 박연의 이러한 주장이 세종의 언급에서도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즉 박연 주도, 세종의 지원 하에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는 것. 이 외에도 박연이 훈민정음의 주자를 제작하고 세종에게 훈민정음을 교육하였다는 정황 등 훈민정음 창제 전 과정에 개입한 근거들을 제시하며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를 증명한다. 난계 박연 가(家) 500년 역사와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한 박연의 업적! 박연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는데 왜 오랜 역사 동안 훈민정음의 창제자로서의 박연은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자로 알려져 온 것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훈민정음 창제에 세종의 역할이 있었음을 분명히 한다. 당시 사대부가 아닌 일반 백성을 위한 문자인 훈민정음의 창제와 정착을 위해서는 임금이란 강력한 힘이 필요했던 것. 즉 박연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해서는 박연의 신변만 위태로울 뿐이어서, 세종과 뜻이 일치한 박연이 이를 창제하고 세종의 이름으로 반포했다는 것이다. 조선 초기는 강력한 왕권시대였기 때문에 왕의 공로로 돌리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근세에 와서는 한글의 위대함과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세종의 이름이 필요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거기에다 저자는 1910년 이전까지 《조선왕조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다는 사실과 해방 후까지도 학자들이 한문으로 된 영인본 위주로 연구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또한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는 점도 그 이유로 제시한다. 그런 사이 세종과 집현적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고정 관념화 되었다고 말한다. 반면 박연은 아악을 정리한 위대한 음악가라는 편견이 고착화되어 훈민정음과 연계하여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박연의 아들 박계우가 계유정난 간당으로 몰려 교형을 당하고 자신 역시 귀양을 가게 되는 역사적 비극의 와중에 그의 업적이 축소 및 외면당하는 양상이 나타났다는 사실도 언급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우리 민족 최대의 업적 중 하나인 한글의 진정한 창제자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박연과 훈민정음》은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라는 사실에 방점이 찍혀 있기는 하지만, 난계 박연 가 500년 역사와 박연의 음악과 시 등에서 발휘된 찬란한 업적 또한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박연의 성장환경에서부터 계유정난의 간당으로 귀양을 떠나기까지의 박연의 삶은 물론, 이후 영조 43년(1767)년 문헌이라는 시호를 받고 박연이 추복되기까지 양반 아닌 양반으로 살아야 했던 난계 후손들의 질곡까지 담아냈다. 익히 알려진 악성으로서의 음악 세계와 난계가 남긴 시 12편에 대한 해설도 소개하고 있으며, 《난계유고》의 소와 ‘가훈 17칙’을 통해 박연의 사상 또한 밝히고 있다. 저자는 〈박연과 훈민정음〉을 통해 오랫동안 묻혀 있던 사실(史實)이 사실(事實)이 되기를 바라며, 국가적 차원에서 ‘박연’과 ‘훈민정음’에 대해 새롭게 연구 검토할 것을 주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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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백의종군, 리순신의 무전유죄
최두환 | 한국문학방송 | 2014-02-0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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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백의종군, 리순신의 무전유죄
최두환 | 한국문학방송 | 2014-02-0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2-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영웅호걸이 있었지만, 실로 리순신 만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광활한 바다가 삼면에 있음에도 해양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리순신 같은 위인이 더 없었고, 그만한 해양사상을 가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원균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너무도 미약하여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 같아 없애고자 했을 때도 리순신이 거느린 그 적은 수군(해군)은 현존함대전략대로 그나마 그 수군이 있음으로 해서 조국이 건재할 수 있었음은 력사적 사실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지금까지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리충무공의 리더십과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해군에서 교재로 간행한 바 있다. 이번에는 충무공 리순신에 대한 조선 조정의 불명예스런 인사 조치에 중점을 두어 그 동안에 몇몇 논문들을 모아 새로이 단장하여 “충무공 리순신을 다시 본다”는 취지로 상재해보는 것이다. |